2014년 1월 27일 월요일

冯小刚:从私人订制到国家订制

冯小刚接下了春晚,然后陷入了春晚。他历经过犹豫、坚定和踌躇满志,当他一个一个把所有节目磨合完毕,最终才明白“众口难调”背后的复杂含义
犹豫 [yóuyù] 머뭇거리다. 망설이다.
踌躇满志 [chóuchúmǎnzhì](자기의 현상태나 이룩한 성취에 대해) 매우 득의양양하다.
磨合 [móhé]길들이다. 적응하다. 교섭하다. 절충하다.
众口难调 [zhòngkǒunántiáo]많은 사람들의 구미가 다 맞추기가 어렵다.


冯小刚:从私人订制到国家订制

“我是业余玩一票。我可以说这辈子绝不可能干第二次。绝对不可能。”
  1月19日下午,冯小刚来到梅地亚中心三楼接受央视采访。他一上来就先声明:“我是一个外行。”
  大半年来,从拍电影到导春晚,年过五十的冯小刚一直处于舆论的中心。在很多人看来,他接下央视春晚总导演的任务是个令人费解的决定。如今春晚影响力式微,其特殊的语言风格恰恰与冯小刚格格不入。冯小刚本人甚至还针对春晚发过两条揶揄式的微博。
  大半年下来,2014年春晚即将跟观众见面,冯小刚也渐渐发现,春晚不是“私人订制”,甚至也不是“大众订制”,它是一个“国家订制”。他强调,这不是自己的本职工作,而是自己“干了个积德的事,打了个义工”。
费解 [fèijiě] 어렵다. 난해하다. 令人费解 [lìngrénfèijiěde] 이해할 수 없는
式微 [shìwēi]몰락하다. 쇠락하다.
揶揄 [yéyú] 야유하다. 조롱하다.


  “领导要感谢我”
  7月12日的新闻发布会之前,冯小刚把自己写的发言稿递给北京人艺院长张和平看。他一上来就说:“领导我就不感谢了,领导要感谢我,我是聋子不怕雷……”
聋子 [lóngzi]귀머거리

  张和平心里“咯噔”了一下。“他虽然是对着稿子念的,但大家都知道,话还是冯小刚的话。”虽然觉得冯小刚写得太尖锐了,但张和平转念一想,这话是从冯小刚口里说出来,“他这么说是会被理解的,也是允许的。同样的话换在另外人身上,换在我身上是不行的。这样的话除冯小刚谁敢说?”

  张和平认为,找冯小刚做春晚总导演,看重的是他从胡同里走出来,“了解普通人的想法,接地气。”
  冯小刚担任春晚总导演的事情其实从6月初就露出了端倪。6月8日,中宣部领导到央视调研,召集往年创作春晚的团队开会,聊如何创新春晚、办一台大家都喜欢的晚会,更第一次把春晚提高到“国家项目”的高度。
端倪 [duānní]실마리, 단서

  春晚执行总导演吕逸涛敏锐地意识到,今年的春晚“会有大变化”。“以往的春晚都说是‘台长工程’,‘国家项目’应该是奥运会开幕式,”吕逸涛说。
  很快,吕逸涛就接到了冯小刚被任命马年春晚总导演的消息。
  张和平也是最早知道这一消息的人之一。冯小刚接到邀请后就给他打电话,很犹豫自己到底“干还是不干,接还是不接”。
  “这不是个一般的活,”张和平对《中国新闻周刊》说,“这个事难度很大,是件众口难调的事情,甚至是件费力不讨好的事情。”
  张和平认为冯小刚当时“可能做足了思想准备”。1月19日,冯小刚在接受央视采访时说,“我自己的团队统统认为我有病。”

  但在更高的层面看来,冯小刚是一个非常适合当总导演的人。他有名气,比较接地气,有观众口碑。更重要的是,成功执导过带有官方背景影片《唐山大地震》的冯小刚善于把握妥协与坚持之间的关系,并且能得到观众和官方的信任。
  对春晚的邀请,冯小刚拒绝过一次,但央视方面派出了文艺中心主任张晓海充当“说客”。冯小刚感慨他们派对了人,在他看来,张晓海是“铁哥们儿,认识小20年了”。张晓海告诉他,“上面领导点了你。”
  “我一想,包括我的这点名气,都是观众喜欢我的电影而来的。我就做一个件馈这个社会的事吧,当一慈善的事。”

2014년 1월 25일 토요일

한국사능력시험 고급 2번째 응시

지난 10월 처음으로 한국사시험 고급에 응시했다.
고등학교때 열심히 한것도 아니고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험 준비를 9월 중순부터 했으니 무슨 생각으로 고급에 응시했나 싶기도 하다..

어쨓든 당시 55점으로 2급 달성에 실패했다.
그러나 공부는 꽤 열심히 했었다. 물론 학생이 아니다 보니
하루에 1시간, 2시간 투자하는 것도 어려워 대부분 출퇴근시
최태성 고급한국사, 근현대사를 동영상으로 보면서 공부했다.

턱걸이로라도 2급 땄으면 했는데 지금생각하면 그때 떨어진게 훨 나았던거 같다.

그리하여 11월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역시 최태성 강좌 다시 한번 들었다.
대략 하루 평균 1시간, 많이 하는 날에도 2시간 이상은 못한거 같다.
대신 영 파악이 안되었던, 조선시대 부분을 좀 집중적으로 했다.

1월 25일 시험 치기전 마지막 기출문제에서 62, 72점 맞으며
그래도 2급은 딸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시험은 부산여중에서 봤는데 막상 문제가 좀 쉽게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시험장 입구에서 나눠준 요약편을 전체 한번 읽을 시간(약 30분)이 있었는데
거기서 한 5문제 이상 맞춘거 같다. 특히 3점짜리 영조와 정조 정책
의천, 지눌 차이점, 경인선 철도 개통 시기 등
암튼 그렇게 가채점 결과 84점이라는 기대 이상 좋은 성적이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첫번째 시험에서는 전혀 모르는 문제가 10문제 이상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모르는건 1문제정도 나머지 틀린건 알송달송이었던거 같다.

또 이번 1월까지 준비하면서 조선시대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지난 10월까지는 대충 공부해서 그런지,
조선하면 아직도 근현대사에서 망한, 그 망한 이유는 유교, 성리학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 자체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신진사대부, 최소한 훈구와 사림간 경쟁 전의
훈구는 부국강병을 추진했고, 특히 세종때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성리학이 국가와 백성을 위한 학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넘어가면서 나라가 망하기 시작한거 같다.
달리 생각하면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나라가 망해서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또 요즘 정도전 역사 드라마가 인기다... 최소한 나는 참 열심히 본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전체적은 판을 짠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대해 참 존경을 느낀다.
그런 인물들이 조선 후기에도 꾸준히 이어졌다면 우리의 근현대사도
그리 나쁘게 가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정도전 끝나고, 역사 그날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드라마와 연계되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참 좋게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 부분에 대해서도 알게된게 많아 좋다.
매년 연변으로 출장을 가는데 그냥 대충 여기가 독립운동 무장투쟁이 있었다고만
알고 정말 무지했다. 이제 이 방면에도 관심이 생겼고
다시 간다면 정말 새로운 느낌이 들고, 프로그램 자체도 개편할 계획이다.

결론적으로 시험 준비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강조되는 역사교육이 정말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영어 교육에는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고, 수업시간도 영어는 필수지만
역사는 선택이다. 그것도 형식상 선택이었다.
수능에 안나온다면 선택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요즘 일본과 과거사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중국과의 역사문제도
드러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에 하얼빈에서는 안중근 기념관이 개관했다.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중국이 승인하게 된 것인데
우리가 안중근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알지만
정확히 뭘 했는지는 잘 모르고 또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안창호와 헷갈린다는 조사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오기위해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의 우리 자신을 더 자랑스럽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된 결단을 거울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신채호

2014년 1월 7일 화요일

처음 글 쓰는 이들을 위하야, 이태준

옳고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서도
<달밤>을 정독하라

<달밤>을 쓴 소설가
이태준

사금을 고르듯 
우리말을 고르고 골라 쓰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

그리고 그는 인기 작문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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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 쓰는 이들을 위하야

1934년 
한 잡지에 실리는 시작한 연재물
바위는 얼른 보고 제힘에 들릴지 
안들리지 짐작이 되지만
글은 그런 짐작이 되지 않아
글에서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많다

'만만한' 소재를 정하고 
물이 '퍽 맑다' 라는 것과
'어찌 맑은지 돌틈에 엎드린 고기들의 
숨 쉬는 것까지 보인다' 하는 것이 다르다
한 사람은 얼른 바쁘게 보았고 
한 사람은 오래 고요하게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래 보고, 고요히 생각하며
가령 오이가 덩굴에 열린 것을보고
오이가 열렸다 할 수도 있고 
오이가 달렸다 
오이가 맺혔다 
또 오이가 늘어졌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다 뜻이 같은 것입니다

꼭 맞는 표현을 찾아쓰고
다 쓴 후에는
고치라 또 고치라 이르는

작문 강의록  

그 글을 쓴
소설가 이태준

최고 문장가로 불린 그가 
학생들에게 잊지 않고 전하는 한마디
내 것을 쓰자 

어디까지 자기가 신경으로 느끼어 보고
자기에게서 솟아나는 정서를 찾아 
그것을 글로 만들것이다 

일상에서 쓰는 우라말로  '나'를 표현하는것
  
그러나
1930년대
힘없이 잊혀가는 우리의 말과 글 조선 사람들
그 속에서  누구나 우리말로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를
하길 바랐던 문장가

이태준이 오랫동안 
연재한 글쓰기 방법론은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을 읽고 나면
그 사람의 마음이 눈에 보인다

글은 그 사람이다

2014년 1월 6일 월요일

"머리가 없다" 中 진출 韩 기업, 망하는 이유 2

"머리가 없다" 中 진출 韩 기업, 망하는 이유 2 [온라인 중국정보 온바오 ONBAO.COM ]

 포스코 차이나 김동진 전 회장
포스코 차이나 성공 스토리 
2011년에 작고한 포스코 박태준 전 회장. 그는 1978년 당시 입사한 지 4년된 포스코 차이나 김동진 전 회장을 싱가폴사무소 주재원으로 발령을 내고 사장실로 그를 불렀다. 김동진 전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잔뜩 긴장해서 사장실로 들어갔더니 해외주재원 생활에 주의할 점을 이것저것 일러주시고는 대뜸 '중국 전문가가 되어 돌아오라'고 지시하셨다. 싱가폴로 가는데 '중국전문가'라니, 사실 그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 중국이 개혁개방을 막 시작한 해가 바로 1978년이다. 당시 동남아 경제권을 주름잡고 있던 화교 상인들과 어울리며 나와 중국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태준 전 회장은 1985년 포스코 홍콩사무소를 창설하기 위해 김동진 전 회장을 발령을 내고 또 사장실에서 독대를 했다. 당시 박태준 전 회장은 김동진 전 회장에게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게 되면 커다란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 될 것이다. 홍콩에 가서 미리 '전진기지'를 만들어보라"고 과제를 제시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던 당시, 한중간 수교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무도 예견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렇게 홍콩으로 날아간 김동진 전 회장은 중국 본토와의 직거래 라인을 뚫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리고 첫 거래가 성사시켰다. 그는 "우회루트(간접교역)을 통해 원산지 표시가 없이 최초로 우리 철강제품을 중국 본토로 보내던 날에는 어찌나 가슴이 벅차오르던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3년 반의 홍콩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김동진 전 회장의 다음 발령지는 베이징이었다. 오랜 해외근무를 마치고 돌아간 그에게 아직 수교도 되지 않은 중국 베이징으로 '냉정한' 발령을 냈다. 그리고 박 전 회장은 한중수교가 성사될 것이니 빨리 가서 중국전문가가 되고 중국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해갈 준비를 당부했다. 

그리고 "중국의 철강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중국인들에게 포항과 광양을 개방할 계획이니 같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라. 꾸준한 신뢰를 통해 중국인들과의 인맥을 확보하라"는 구체적 지침까지 전달했다. 김동진 전 회장이 당시 한중간 비행 직항로조차 없던 시절에 베이징에서 짐을 푼 지, 1년만인 19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됐다. 

포스코 차이나가 설립한 회사와 공장이 중국 전역에 50곳이 넘는다. 2010년 김동진 전 회장이 은퇴를 하기 전 연매출이 16억 7천불이었다. 이는 포스코 그룹 전체 매출액의 30%가 넘는 수치였다. 김동진 전 회장이 포스코 맨으로 35년을 해외에서 땀 흘린 결과이다. 

포스코는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에서 철강의 신화를 만들어낸 국가적 기업이다.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이한 중국에서 제2의 포스코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인은 미래를 예측하고 전문가를 양성해 리더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 베이징현대자동차 공장
전진하는 기업, 후퇴하는 기업, 그 차이는? 
중국은 2010년대 들어 개혁개방 30여년만에 산업화 성공을 발판으로 한국과 같이 제2차 산업에서 제3차 산업으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중국 사회와 시장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중국 진출 전략도 수정됐다. 공장 중심에서 시장 중심으로 전략적 방향을 재설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전략에 걸맞는 사람과 제도를 준비하지 못하고 방침만 수정됐다.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내수시장에 집중하자는 전략적 방침만 강조했다. 

중국 진출 한국기업이 내수시장을 강조하면서 뚜렷한 성장 실적을 기록한 기업이 과거에 비해서 현저히 줄어들었다. 성공한 대표적 기업들을 살펴보자. 

베이징현대자동차는 올해 중국에서만 100만대 이상의 자동차 판매기록을 세웠다.중국 자동차시장에서 연간 판매량이 백만대를 돌파한 외국계 기업으로는 상하이폴크스바겐(上海大众·상하이다중), 이치폴크스바겐(一汽大众)에 이어 베이징현대자동차가 세번째이다. 중국시장 진출이 앞섰던 일본자동차 기업도 이루지 못한 '성공 신화'이다. 폴크스바겐이 백만대 판매기록을 달성하는데 20년 이상이 걸린 반면, 현대자동차는 11년만에 달성했다. 

신생활그룹의 지난해 연간 매출액이 15억6천만 위안(한화 3천억원)이었다. 1994년에 설립된 신생활그룹은 선양 화장품공장, 칭다오 식품공장, 상하이 화장품공장 등의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중국시장을 집중 공략해왔다. 신생활그룹은 중국 현지에서 한국계 독자기업으로 가장 안정적으로 성장한 기업이다. 특히, 신생활그룹은 한국 국내의 중국지사 개념으로 출발한 기업이 아니다. 후방의 지원 없이 중국 현지에서 한국인이 독자적으로 세운 기업으로 성공한 대표적 기업이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은 과거 국내에서와 같이 제조 및 수출형으로 이윤을 창출했다. 이들 기업들은 중국 경제성장 이후 주춤한 반면, 베이징현대자동차와 신생활그룹의 경우, 중국 내수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이다. 중국내수시장에서 성공한 이들 기업의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공통적 특징은 독자적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현지 시장의 변화와 특성을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독자적 판단력과 결정권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과거 공장을 운영할 때의 상황과,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상황은 전혀 다르다. 공장은 기계를 상대하고 현지인은 채용된 내부 직원만 상대하며 생산 이윤만 계산하면 된다. 반면 시장은 기계가 아니라 현지 사회를 상대해야 하고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무작위 대중, 즉 잠재적 고객을 상대로 해야 한다. 

공장 운영은 설비와 운영 매뉴얼만 잘 갖추고 있으면 국내에서도 원격 운영이 가능하지만 시장 공략은 매뉴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지 사회와 시장 상황, 그리고 소비자의 관심과 만족을 미리 예견한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수시장 공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준비된 리더와 독자적 운영체제가 성공의 전제조건이다. 

현재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경우, 사소한 일도 본사 '컨펌'을 거쳐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 직접 맞대면을 하고 보고할 수 없으니 문서를 통해서 보고를 하다보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현지의 상황에 뿌리는 둔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시장 대응에 한 박자 늦게 되고 현지 실정과는 다른 방향의 엉뚱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기업의 인사제도의 측면에서 해외파견근무는 거쳐가는 자리로 만들어 놓은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해외 근무를 하다보면 기업 내에서 인사결정권자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승진의 기회를 놓치게 되니 길어야 3,4년 정도 근무하고 돌아갈 생각부터 하게 된다. 일부 기업은 중국 법인대표를 정년 퇴임을 앞둔 임원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중국 현지법인은 회사와 직원은 있는데 '사장'은 없는 회사로 운영되게 된다.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가 없는 회사에 무슨 실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투자만 하고 매출을 낼 수 없는 구조이다. 그러니 '시한부' 근무를 하는 입장에서는 파견근무 기간만 별 탈 없이 보내고 하루 속히 돌아갈 생각만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운영구조에서는 허위 보고도 종종 발생할 수밖에 없다. 

판단력과 책임감, 결정권이 없이 해외 시장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중국은 13억의 대륙성 국가이다. 한국 시장과 같이 수도권에 하나로 집중된 것이 아니라 광저우, 선전을 중심으로 한 화남권,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동권,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화북권, 선양을 중심으로 한 동북권, 청두와 시안을 중심으로 한 서부권 등 대략적으로 분류해도 5군데가 넘는다. 

상하이에 적을 두고 있는 회사라면 상하이 시장을 상대하는 규모이지 중국을 논할 수 있는 규모나 단계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진출이 아니라 중국 상하이 진출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중국 여기 저기에 동시다발로 회사를 세우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포스코 차이나, 삼성 중국본부와 같이 현지 지휘체계를 갖추지 않고 서울에서 원격 지휘를 한다. 그러니 현지에서 투자금이 술술 새고 있어도 이를 개선할 방안은 커녕,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국내 성공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새로운 창업을 하는 것과 같다. 포스코 차이나를 비롯해 베이징현대자동차, 신생활그룹의 성공은 중국 현지에서 새로운 창업을 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2, 제3의 '김동진'이 중국성공 신화의 비결
대기업에서 장기 근무를 한 이후, 중국 현지에서 회사를 차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하지만 대기업 근무라는 화려한 경력에 비해 개인 사업으로 성공하는 사례가 오히려 적다. 대기업의 옷을 벗는 순간, 무기력해진다. 대기업의 외곽 회사를 차리고 일거리를 보장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회사를 차려서 성공한 대기업 출신 사업가는 극히 드물다. 

이는 대한민국 대기업의 조직운영 방식이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하는" 소극적, 수동적 인간형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수족으로만 쓸모 있는 인재를 만들지, 독자적 경쟁력을 갖춘 인재 양성에는 관심이 없다. 

제조업 시대의 종적 조직운영체제로 서비스업 시대에 적응하기는 불가능하다. 대기업의 영향력이 통하는 국내시장에서와는 달리 독자성, 자율성 없이 해외시장에서 성공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생존 전략을 바꾸고 운영 패러다임을 바꿔야 새로운 성공 신화를 만들 수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성공 신화는 새로운 인재를 준비해야 가능한 일이다. 인재는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예견하고 준비해야 얻을 수 있는 '보물'이다. 국내에서 제조업으로 성공한 창업주가 해외에서 혹은 타 업종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곧 기업이 망하는 지름길이 된다. 창업주가 해외에서도 처음처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각오가 아니라면 새로운 사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고 지혜이다. 

성공한 기업의 창업주 역시, 젊어서부터 밑바닥에서 시작해 평생을 배우며 스스로 리더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근년들어 중국 현지의 우리 기업들이 현지 여론의 도마 위에 종종 올려지고 있다.외국계 기업이 여러 모로 불리한 상황이다. 남의 나라 기업이 자기 나라 시장에서 '잘 나가는' 것을 순순히 인정할 나라는 없다. 기업의 사회문화적 교감이 이윤 창출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세월을 두고 현지 소비자와 깊은 인연을 만들어 가야 한다. 머리가 없고 주인이 없는 회사에 이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아시아의 작은 용이 하늘로 승천할 때, 잠자고 있던 중국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태세이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등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고 함께 승천하려면 준비된 기수가 절실하다. 중국 진출을 하자마자, 기사 한 꼭지로 어두운 면은 감추고 작은 실적을 부풀리려 하지만, 당장의 주가는 꿈틀할지 모르나 그만큼 기업의 수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포스코 차이나가 연매출액 16억 달러라는 성공 신화를 만들기까지 3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인생을 기업에 바친 새로운 리더가 있었다. 공을 들인 시간이 길수록 그 과실은 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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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화로 망한다" 中 진출 韩 기업, 망하는 이유 1

"현지화로 망한다" 中 진출 韩 기업, 망하는 이유 1 [온라인 중국정보 온바오 ONBAO.COM ]

내수시장 공략 '현지화'
중국 진출 한국기업이 몇년전부터 추진해온 '현지화 전략'을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중국에 대한 시각이 제조업 기지에서 유통 시장으로 바뀌면서 추진해온 현지화 전략이 곳곳에서 문제가 노출되고 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국내 제조업체들 뿐 아니라 대기업이 대거 중국에 진출해서 현지 공장에 세우고 제조기지를 구축했다. 한국은 산업화의 성공으로 2차산업 시대를 넘어 3차산업시대로 진입하면서 임금, 세금, 부동산, 규제 등의 제조환경이 열악해지자 중국 진출이 급속도로 진행됐었다. 

중국은 당시 저임금, 저지가, 세금혜택과 함께 규제 관련 법률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제품을 생산해 국내 혹은 제3의 시장으로 유통했다. 중국 현지 생산체제를 갖춘 한국 기업들은 적지 않은 제조 이윤을 얻었다. 

하지만 중국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제조환경이 열악해지고 시장이 성숙되면서 몇년전부터 중국 진출 한국기업들이 중국 내수시장 공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수시장 공략에 나선 한국기업들은 하나 같이 '현지화' 전략을 강조했다. 

당시 나는 현지화 전략은 한국기업의 차별화를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오히려 실패를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한국기업의 현지화는 구체적으로 주재원 감축과 동시에 현지인 대체, 그리고 재료의 현지 조달, 한인시장 외면 등으로 진행됐다. 


현지화로 차별화 포기
2000년에 접어들면서 국내 대형유통기업이 중국시장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며 진출했다. 몇년전 베이징 왕징에도 점포를 내고 영업을 시작했다. 개업 초기에 매장내에서 현지 고객과 직원간에 다투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고객이 불만사항을 직원에게 말했는데 현지 직원이 불성실하게 답한 모양이었다. 현지 고객은 "'한국마트'라고 해서 왔는데 이런 식이면 다른 게 뭐냐?"라고 반문하고 화를 내며 사라졌다. 

주요 도시에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린 이 업체는 서비스와 상품의 차별화에 실패해 왕징, 우중로 등의 한국식품가게보다 못한 수준이다. 현지 상품으로 가득 채우고 현지 직원 수준의 서비스로 운영하면서 브랜드만 한국인 셈이다. 현지 고객들은 한국 브랜드를 보고 한국 식품과 상품을 기대하고 갔다가 금방 발길을 돌린다. 

왕징의 아파트촌 현지 아이들은 여름 되면 한국 아이스크림만 찾는다. 아이들은 경제적 개념은 없지만 입맛은 정직하다. 한국 아이스크림을 맛본 중국 아이들은 오직 "한국 것(韩国的)"만 찾는다. 현지 업체들이 앞다투어 만들어낸 비슷한 제품도 아이들의 입을 속이지는 못한다. 

최근에 중국 CCTV에서 삼성 캘럭시 제품을 대상으로 '표적방송'을 하고 문제를 삼았다. 현지 삼성서비스센터에 찾아가서 추궁을 하듯이 준비된 질문을 해서, 현지 직원이 응겹결에 대답한 '멘트'를 따서 그대로 방송에 실어 내보냈다. 마치 삼성 대변인의 말인양 인용해서 보도했다.

모 전자회사의 경우, AS 시스템을 현지 가전제품 수리센터에 맡기면서 현지 고객의 불만과 항의가 잇따랐다.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AS를 신청하면 AS 대리점의 현지 직원은 수리는 안 하고 제품 구입 혹은 부품 유료교환을 권해 고객의 불만이 쌓이기도 했다. 이같은 서비스 시스템으로 현지에서 브랜드 신뢰도가 급속히 실추됐다. 

일부 기업은 현지화를 위해 한국과 벽을 쌓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모 식품회사는 브랜드가 외국의 유명도시를 연상케해 현지 고객들이 한국기업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현지화의 전략을 잘못 인식한 중소기업들은 무턱대고 중국시장을 말하기도 한다.최근에 진출한 한국 의류업체는 중국시장을 공략한다며 현지 한인고객은 관심이 없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자본금 규모는 베이징 왕징 정도도 벅차보이는 중소기업이 13억 중국시장을 공략한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었다. 중국 현지 기업 중에서도 전국 규모의 판매망을 갖춘 국가급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우리 기업들이 상대하는 중국 현지의 잠재고객층은 한국 브랜드라고 하면 주변의 한인들에게 확인하게 된다. 비싼 가격의 제품일수록 구입에 신중하기 마련이다. 하루가 멀다가하고 새로운 브랜드와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연히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 지인의 말 한마디가 제품 구입에 결정적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근년들어 중국 관광객이 한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한국 관광을 갔던 중국인은 베이징 왕징, 상하이 우중로 등 코리아타운을 찾으면서 코리아타운 경기 회복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중국 진출 한국기업들은 현지화 과정에서 한국기업의 특성과 장점을 잃어버리고 현지 기업과 비교해 차별화하는데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Korean is something different"
한류문화는 이미 중국 대중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같은 문화적 현상이 한국 제품과 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경제적 가치 창출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중국 현지기업들은 맞춤법도 틀린 한글로 포장을 해서 한국 상품인양 시장에 내놓는데, 한국기업은 오히려 '한국'을 감추고 현지 기업이고 싶어한다.

근년들어 중국 민항에서도 한국인 스튜어디스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승객이 있는 노선에만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중국 국내선 항공기에도 한국인 스튜어디스를 배치한다. 서비스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대한항공 혹은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한다. 중국민항 국제선을 탑승했을 때, 스튜어디스가 뒤에 서서 어깨를 툭 치며 "핸드폰 꺼!(关机)"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황당한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다. 이같은 황당한 서비스를 종종 경험한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한국민항만 이용하게 됐다. 

차별화는 인재와 혁신적 철학에 의해 가능하다. 현지 직원으로 대체하면 인건비를 줄이고 내수시장 공략에 유리할 것 같지만 차별화에 실패할 수 있는 함정도 있다.외국기업이 차별화에 실패하고 현지 기업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비법은 없다. 

한국 국내 수준의 서비스 예절, 인재 경쟁력은 단기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성장 환경과 사회문화, 장기간의 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 공장은 매뉴얼대로 반복하면 돌아가지만 시장에서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는 매뉴얼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중국 현지에서 유학한 한국유학생들은 현지 한국기업에 취업하려 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취업할 경우와 비교해 현지 취업을 할 경우에는 조건이 현지인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정식직원 채융으로 유혹해서 인턴 사원으로 채용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리하는 사례도 있었다. 

삼성과 현대자동차는 중국시장에서 대단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비결은 차별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며 한류문화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지화 전략이 틀린 것은 아니다. '업그레이드'는 못해도 최소 '다운 그레이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계 기업으로서 갖추어야 할 차별화를 포기하는 현지화는 '자살행위'일 수도 있다. 현지화 전략이 현지 시장에 비굴한 자세를 취하고 한국과 한국인을 외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인인 것이 부끄러운가? 중국인은 한국에 호감을 갖는데, 왜 한국이 아닌 것처럼 행세하려는가? 겸손과 비굴은 전혀 다른 뜻이다. 중국인이 최고로 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다. "你有思想的" 이는 "당신은 철학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도 생각이 깊고 혁신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기업을 존중한다. 

중국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들은 13억의 중국시장을 거론한다. 과연 13억 인구 전체가 잠재적 고객일까? 실제 우리의 잠재적 고객은 상위 10%의 인구이다. 그리고 상위 10%의 인구를 공략해야 그 다음의 계층도 호감을 갖는다. 중국의 소비시장 구조는 계란의 노란자와 흰자와 같이 구분돼 있다. 현지 시장과 사회,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마케팅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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