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중국판 이순신, 악비가 홀대받는 이유

예전 북경 유학끝나고 항주 여행 갔을때, 악비묘를 간적이 있다.

당시 나는 악비가 누군지 몰랐다. 단, 삼국지에 악비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그 인물인가 잠깐 생각했었지만, 그렇게 까지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겠구나 하고 그냥 스쳐지났다.


그 후 송나라 장군임을 알게되었고, 

악비를 죽게한 진희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진희의 한자를

이름으로쓰지 않는 다는 얘기도 들었다.


오늘 인터넷에 찾아보다

2006년에 보도된 꽤 지났지만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간략하게 얘기하면 중국이 민족간 중국전체 통일을 위해
한족을 위해 싸운 악비를 더이상 우상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한참 동북공정을 준비했던때가 아닌가 싶다.

"무릎꿇고 있던 진희가 일어났다"

역사는 이렇게 현재 내가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나 보다.


국판 이순신, 악비가 홀대받는 이유

한국인들이 이순신을 구국의 성웅으로 칭송하듯이, 현대 중국인들은 악비(岳飛, 1103~1141)라는 인물을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원균을 이순신의 정적이라면서 혐오했듯이, 현대 중국인들은 진회(秦檜)라는 인물을 동일한 이유에서 혐오했다. 

그런데 여기서 '떠받들었다'나 '혐오했다'와 같은 과거형을 쓴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최근 중국에서 악비와 진회에 대한 평가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악비라는 인물은 어떤 이유에서 중국의 민족영웅이 되었으며, 최근 그가 갑작스레 홀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악비 좌상
중국 허난성 탕인 지역 출신인 악비는 동아시아 정세가 고려-북송-요나라 3국 정립시기에서 고려-남송-금나라 3국 정립시기로 교체되던 때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이 두 시기에 고려는 그대로 국가를 유지했지만, 만주의 주인이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바뀌자 그 여파로 한족정권도 북송(北宋)에서 남송(南宋)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악비는 북송이 남송으로 교체되던 때의 인물

이 두 시기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원-만주-한반도가 제각기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세력균형이 존재했던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표현인 3자 정립(鼎立)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전기에 한반도가 강한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국제적 세력균형에 기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은 칭기즈칸의 출현 이전까지는 계속 존속했다. 

고려-북송-요나라가 동아시아를 3분(分)하던 시기에, 만주에서는 여진족(흑수말갈족)이 서서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본래 여진족은 고려의 직접 지배 혹은 책봉을 받던 종족이었지만, 이 시기에 종족 통일을 성취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115년에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했다. 그 이전에는 여진족이 고려의 책봉을 받았지만, 금나라 건국 이후에는 거꾸로 고려가 여진족의 책봉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고려를 우방으로 만든 금나라는 1125년에 북송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다음해부터는 북송까지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금나라의 북송 압박 시작

이처럼 금나라의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북송 제9대 군주인 휘종은 아들인 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의 포로가 됨으로써 북송은 곧 멸망하고 말았다(1127년). 

한편, 휘종의 또 다른 아들인 고종이 1127년에 중국 남부지역에 남송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악비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절도사가 된 악비는 구릉지라는 강남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금나라의 기마군대를 막아냈으며, 1137년 선무사에 임명된 후로는 중원 지역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중국판 원균이 등장한다. 금나라와의 확전을 반대하는 재상 진회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엄청난 대가만 치를 뿐"이라면서 악비에 대한 정치적 압박에 나섰다. 결국 악비는 진회의 '모함'으로 1141년에 투옥되었으며 나중에는 처형까지 당하게 되었다. 

진회의 '모함'으로 영웅 악비 처형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더 이상의 확전을 반대하는 진회의 논리가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의 기본 판도가 3자 정립의 세력균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송이 3자의 한 축인 금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도 힘들었거니와, 정말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당시의 동아시아 질서는 예측불허의 혼란으로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악비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부활'하게 되었다. 악비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되며 대대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이순신 장군이 추앙을 받는 것처럼 그는 죽은 지 수백 년 만에 중국에서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민족인 여진족으로부터 중국의 한족을 지켰다는 그의 충성심이 현대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악비가 영웅시되는 것과 함께, 악비를 '모함'했던 진회는 '간신배' 혹은 '반역자'의 전형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악비가 영웅시되는 상황에서 진회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처럼 말이다. 

현대 중국에서 악비는 영웅, 진회는 반역자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 내에서 최근 들어 악비의 위상이 '원위치'되고 있다. 악비를 영웅시하던 사회 분위기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전 같으면 이민족에 맞서 한족을 지켜 낸 인물이 중국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족=중국이라는 등식이 어느 정도는 성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은 한족과 소수민족을 통합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있다.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통합대상에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는 한족=중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한족과 만주족(여진족)을 포함한 새로운 통합 국가를 만들려는 판국에 여진족에 대항해 한족을 지킨 악비를 계속 영웅시한다면, 이는 만주족은 물론 다른 소수민족의 '의구심'을 초래할 만한 일일 것이다. 악비가 재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만약 악비가 서양국가에 대항하여 중국을 지킨 인물이라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중국사회에서 '효용성'이 다 떨어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국가통합작업으로 악비 숭배 '스톱'
▲ 악비의 라이벌 진회에 대한 최근 변화를 특집으로 다른 중국 언론. 아래 가운데에 보면, 진회 부부가 꿇어 앉아 있는 기존의 동상이 보이고, 위쪽에 보면 그들 부부가 일어선 최근 동상이 보인다.
ⓒ 중국 <국제재선> 홈페이지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악비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과 함께 진회의 이미지가 다시 상승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간신배' 진회 부부가 땅바닥에 꿇어 앉아 있는 동상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들 부부가 일어서 있는 동상이 조각되기도 했다. 진회의 위상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중국 내에서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 내 분위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웃나라 중국이 지금 신속한 국가통합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영웅이었던 악비가 추락하고 지난날의 간신배였던 진회가 다시 일어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웃나라들인 중국과 일본이 국가통합을 가속화하고 있는 이때에 한반도만이 여전히 분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통일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합의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웃나라 중국의 국가통합작업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한국에게 의미 있는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함께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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